이 글에는 필자의 주관이 들어가있으며, 이 책의 좋다 또는 나쁘다 평가를 목적으로 한 글이 아닙니다


읽었던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한 메모 목적으로 이 글을 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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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심리학의 잣대로 분석한 도시인의 욕망과 갈등.

머물기에는 갑갑하고 떠나기에는 아쉬운 이곳 우리를 도시인이게 하는 22가지 심리.


<뒷면>

지친 도시인의 삶을 위로하는 명쾌한 심리 치유서.

복잡한 도시인의 마음을 뒤흔드는 심층 심리를 분석한다.


<작가의 말>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현재, 도시의 삶, 궁극적으로 도시 집단 속의 나를 샅샅이 살펴보고 이야기하려 한다

무엇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괴로운지 그 속삭을 한번 보자. - 2009년 5월


2009년이면 스마트폰이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던 것 같다.


1장 소통의 부재

 - 전화보다 문자, 소통이 아닌 통보의 커뮤니케이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심리적 안전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여기에 휴대전화가 등장한다. 


전화를 받았을 때 "지금 어디야?"라고 상대방이 묻는 것 (휴대전화로 통화 시에 가장 불쾌한 말이라고 한다)

휴대전화 벨이 울리면 즉각 응대해야 하는 어려움.

휴대전화는 편리함의 뒷면에서 우리의 심리적 안전공간을 위협한다고 할수 있다


휴대전화가 동시적 커뮤니케이션으로서 실시간 반응을 해야하므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는 반면,

문자와 같은 비동시적 커뮤니케이션은 느리지만 편하고 에너지가 덜 든다.


우울증세를 보이는 한 고등학생이 자신을 찾아와서 하소연한 이야기가 있다

친구들이 자신을 차단해놓고 "우리 요즘 그 사이트 안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의 상실감은 오프라인보다 더 클 수도 있다


문자(요즘으로 치면 카톡, SNS)를 통한 소통은 안전하고 편하지만 비효율적이다

목소리, 얼굴 표정과 같은 풍부한 정서는 느낄 수 없다

이모티콘을 사용하고, 길게 쓰고, 농담을 해도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던 깊은 정서적 교감은 어렵다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발달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편하고 빠르고 이기적이면서도 욕먹지 않을 수 있으면서도 안전한 방향으로.

하지만 인간관계의 본질은 지연과 둘러감은 있어도 변화는 없다고 한다


방법이 많아지고 거리가 가까워지고 시간의 제약이 없어져도 여전히 외롭다. 어떨 때는 그 이전보다 더.


저자는 우리의 외로움이, 도시의 발달로부터 온다고 설명하는 듯 하다

편리해지는 것이 오히려 역으로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든다고


제목과 연관지어보자면, 전화보다 문자가 주가 되면서 깊은 정서적 교감이 부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 아닐까




 - 우리는 하나다, 폭탄주를 마시면...

여기는 요약하자면, 도시의 삶에서 친해지고 싶지 않지만 의무적으로 친해져야 하는 비즈니스 관계에서.


폭탄주가 해결책이 되어준다고 한다. 흡수가 빠른만큼 거부감도 크지만.


그리고 비즈니스 관계 속에서 자신의 심리적 공간을 어떻게 확보하지는지.




 - 다문화가정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

차별의 또다른 이름, 단일민족.


역사를 돌이켜볼 때 억압받은 적이 있는 집단의 결속력은 매우 강하다고 한다.


유대인이 있고, 우리나라가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이런 민족은 힘든 일이 발생하면 '우리 민족은 자랑스러운 민족이나 외부의 침략에 피해를 입어 지금 힘들게 살고 있다'는 피해자 논리가 습한 날 곰팡이같이 순식간에 퍼진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살기 힘들다고 이야기하면서,


오랫동안 억울함을 당해온 민족이라는 세뇌를 받아온 우리는 그렇게 '되로 받고 말로 갚는' 마음으로 '명동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집단의 순도가 떨어지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 이러한 경향을 강화한다 (즉 다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문화 가정 사람에게 공격성을 보이는 이유를 위와 같이 설명한다




 - 믿으면 천국행, 믿지 않으면 지옥행?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자는 종교에 대해서 부정적이거나, "도를 아십니까"에 많이 시달린 것 같다고 느꼈다 (...)


사는 것이 각박해질수록 사람들은 마음의 위안처를 찾는다.


종교의 근원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지금, 자연현상은 웬만하면 다 설명할 수 있지만 오히려 종교인의 수는 오히려 늘고있다


역사는 과학이 영원불변한 진실일 수 없다고 반복해서 알려줬고


그러므로 나와 세상 사이의 연결 역시 안정적으로 어어져 있기 힘들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논리적으로 답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신'의 영역이 존재의 불안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 내용은 극도로 축약해서, 종교활동에서 카타르시스를 경혐할 수도 있는데, 카타르시스를 집단적으로 경험할 경우 사람들 사이의 결속력과 연대의식은 시너지를 이루며 강력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혹시 믿음이 있으신지요?"


필자가 이런 질문을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답답함, 반발감, 자존심 훼손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리고 믿음을 강조하며 반복해서 얘기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한 근복적 미등ㅁ이 약하고 그마저도 흔들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후 여러가지 설명에 프로이트의 논리로 설명이 되어있고


이 도시의 밤을 비추는 수많은 십자가들은 결국 도시인의 집단적인 외로움과 고립감, 불안감을 반영하는 지표라고 한다

(이 부분은 읽으면서 종교인들에 대해 저자의 시선이 부정적이라고 느껴졌다)




 - 영어라면 무조건 오케이, 예스맨의 두 얼굴

여기도 프로이트의 말 중에서 트라우마, 히스테리 연구를 통해서 설명한다


조기 영어교육 열풍을 비판하는 듯 하고, 커다란 희생을 겪어가며 얻어내려는 영어에 대한 무모한 집착, 굳은 결의의 내면에 그만큼 강한 공격성이 숨어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동남아에 가서 그들의 영어 사용수준을 트집잡는 공격성도 언급한다


이쯤 읽으보니, 저자는 우리가 도시에서 살면서 느끼는 외로움 등보다는,

자신이 타인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 탐구하고 반성해보라는 뉘앙스로 느껴진다




WRITTEN BY
hojongs
블로그 옮겼습니다 https://hojongs.github.io/